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2세 (문단 편집) ==== 독일과의 관계 ==== [[파일: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카이저 빌헬름 1세.jpg]] 알렉산드르 2세와 외삼촌인 독일 황제 [[빌헬름 1세]]와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.(1872년 촬영.) 왼쪽에 [[실크 햇]]을 쓰고 키가 큰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, 가운데 실크햇을 쓴 사람이 빌헬름 1세. 그 옆에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. 그리고 이 순간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였다. 당시 [[프로이센 왕국]]의 재상에 올랐던(1862년)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. 그래서 폴란드 봉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[[폴란드]] [[독립운동가]]들이 프로이센으로 넘어오면 즉각 체포하여 러시아에 송환시키기로 약속했다.(알벤스레벤 협정)[* 이는 프로이센도 [[폴란드 분할|오스트리아,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갈라 먹고 있던 처지]]였기 때문이다.] 이렇게 되자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이것은 러시아에게 희소식이었다. 이에 자신감을 회복한 러시아는 [[독일 통일]] 문제에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편을 들며 [[오스트리아 제국]][[보오전쟁|을 엿먹였고]], 그러는 사이 착착 군제 개혁과 군사력 확충을 지속하며 기회를 노렸다. 그리고 1870년에는 비스마르크의 요구대로 [[보불전쟁]]에서 중립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데 통일 독일의 지지를 받아냈다. 러시아의 일방적인 파기 선언에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반발하긴 했지만, 러시아는 비스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. 영국이 반발하여 런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을 모았지만, 비스마르크가 러시아를 지지하고 유럽 각국들이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런던 의정서를 체결했다. 이로써 러시아는 [[부동항|'''흑해 함대 주둔권'''과 '''흑해 연안 도시의 요새화'''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.]] 그러다가 1875년 오스만령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계기로 다시 발칸 문제가 불거지자 오스만 정부의 야만적인 탄압을 이유로 간섭, 1877년 [[러시아-튀르크 전쟁|제2차 동방 전쟁]]을 일으켰다. 개혁의 성과인지, 오스만 군대가 너무 약했던 건지 압승을 거두며 [[이스탄불|코스탄티니예]]까지 위협했으나, 영국의 위협으로 협상에 나서 [[산 스테파노 조약]]을 체결해 [[불가리아]] 공국을 성립시키고 [[세르비아 공국]], [[몬테네그로 공국]]과 [[루마니아 공국]]을 위성국으로 독립시키며 [[발칸 반도]]에서 패권을 장악하나 싶었으나...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맹렬한 반발과 양국의 전쟁 불사 위협으로 위기가 고조되자, [[독일 제국]]이 끼어들어 '성실한 중개인'을 자처한 비스마르크에 의한 [[베를린 회의]](1878년)에서 문제의 조정이 이루어졌다.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조정 결과 러시아가 설정한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러시아는 지중해로 나갈 길이 막혔고, 러시아의 보상은 크림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할양한 [[부자크]] 지방을 돌려받고 [[아르메니아]] 일부를 조금 얻는 수준에 그쳤다. 오히려 총 한 방 쏘지 않은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이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에 대한 [[보스니아-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|위임통치권]]을, [[영국]]이 [[키프로스]]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따냄으로써 영국과 오스트리아만 큰 이득을 얻고 러시아의 남하가 또다시 저지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. 결국 '''[[현실은 시궁창|러시아는 막대한 국력을 투입해서 벌인 전쟁에도 독일한테 크게 엿을 먹고 얻은 것이 없었다.]]''' 이에 '''제대로 빡친'''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우호관계를 끝내기로 하고, 1873년 맺었던 삼제협정의 무효를 선언했으며, 러시아-독일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시키고, [[빌헬름 1세|외삼촌]]에게 전쟁 선포에 버금가는 살벌한 서한을 보내는 등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막나가기에 이르렀다.[* 조카가 삼촌에게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분노의 서한을 보낼 정도로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반감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.] 이에 러시아의 침공을 받을까 봐 불안해진 독일은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을 끌어들여 1879년 독-오 동맹을 맺는다. 결국 [[제1차 세계 대전]]의 [[협상국]]vs[[동맹국]]의 구도가 점차 현실화된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